현대 한불불교의 시원
​범어사

화엄종찰
호국불교의 요람
근대 간화선 확산
근현대 계율 운동의 시작
가을 일출이 아름다운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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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과 특징

신라 신문왕 18년 (678)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 되었다. 여기에는
첫째 신문화로써 화엄종 도입과 육성으로 국가의 문화적 성숙도 향상과 
둘째 동해안으로 빈번한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전략적 위치로써 금정산 일원 차지하므로  주변 주민을 모으고 위무할 필요가 사찰 건립의 필요가 부합하였다.
범어사 일대는  삼한 이래의 민족 신앙인 풍류도 수행공간이었고 산신신앙의 주요기도처였던  이곳을 사찰 창건 적지로 선정되었다. 
범어사는 화엄종 승려였던 의상에 의해 창건 되어 화엄 십찰 가운데 하나였다. 또 통일신라기 한국불교의 대표적 학승인 원효도 이곳에 거처하였었다.
호국불교의 전초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은 서북의 중국과 바다 건너 일본과의 관계가 중요하였다. 
그 가운데 부산과 범어사 일원은 대일관계에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동해 남해 그리고 낙동강에서 각각  에워싸인 위치로 부산 일대는 왜구에 의한 빈번한 침략 대상이었다. 창건 자체가 이와 관련 되어 있고 특히 임란 이후 승병사령부가 설치 되는등 정유재란등은 국가적 위기에서 주요한 역활을 하였다. 정유재란 이후 국가적 역량부족에도 불구하고 1658년에 범어사는 대대적으로 중창되었다. 이는 금정산성에 승병의 주둔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다.
근현대 한국불교의 선도

부산은 전략적 위치는 역설적으로 개항 이후 가장 중요한 교통 요지가 된다. 이로 인해 범어사는 한국불교에서 중요한 역활을 하게 된다. 불교적으로 일본을 통해 서구적 불교 연구성과들이 유입되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출발지이면서 보편교육의 전초가 되어 새로운 안목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였다. 
​또 경허스님을 중심으로한 간화선 운동, 지계운동등 전통 불교 회복으로 조선에 의해 억압되었던 불교가 부흥하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해방후 육이오때는 전사자를 화장 안치하고 추도하는 공식적인 국가적역활을 하였다. 나아가서 동산스님을 기점으로 한 정화운동의 중심지로 역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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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석조
주차안내소와 어산교라는 다리를 지나 
일주문 쪽으로 올라가는 첫번째 문화재가 이 석조이다.
지금은 많이 파손되어 원형을 알수 없으나 
제각 연기문이 히미하게 나마 남아잇다.
이 석조는 원래 원주실 뒤에 있던 것은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전체 크기로 보면 해인사 법주사 석조 보다 크다. 
또 제작 시기는 상당히 이른시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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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길

석조 왼쪽으로 돌판을 깐 길이 있고 다시 그 왼쪽에 비전이 잇다.
이 돌길은 부산역에 깔렸던 돌이었다 한다.
부산역이 증개축 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해진 돌을 가져다 
범어사 마사토길을 포장 했다하니 
당시 부산시에서 불교와 범어사의 위상을 알수 있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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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갑계록

범어사에는 조선말 불교의 현실을 보여주는 흔적이 상당히 많다.
자연석에  새겨진 수십기의 갑계록들은 
숙종 때 대대적인 중창후 유지 보수와 관련된 기록이다.
여기에는 승장등 당시 승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 승려 조직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들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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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당간지주
​ 수곽에서 돌길을 따라 약 20m쯤 올라간 오른쪽 연못 위에 두줄기 돌기둥이 서 있다.
당번 지주를 세우는 용도로 사용되어 당간지주라 한다.
통일신라기 유물이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
돌기둥 사이에 쇠나 나무로된 당간 기둥을 세우고 그 꼭데기에는 용두등으로 장식하였는대 
사찰에 큰 법회가 있을 경우 여기에 당번을 걸어 장식 했었다.
현재 이 당간지주는 기둥 두 줄기외에는 원형을 알수 없다.
특히 하부 기단은 둥글게 일본식 석축에 쌓여 았고
또 현재는 땅 또는 기단에 덮혀 있어야할 부분이 드러나 있으며 지주 사이의  기둥 밭침도 없다.당간지주등 원형이 남아 있는 당간지주들을 참고로 하면 하부에 기단부가 있었을 것이다.
법주사, 담양, 나주 읍성 동문 밖등에 아직도 이 
철당간과 지주와 기단 장식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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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전경

당간지주를 지면 다음은 사거리다. 
오른쪽은 옛 박물관이고
오른쪽 길로 올라가면 부도전 대성암 안양암으로 가는 길이다.
이갈림길 모둥이에는 하마비가 있고.
중앙 돌길로 가면 바로 일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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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비

여기에서 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올라오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분위기에서 유생이나 벼슬아치들이 
사찰에 들어와 무리한 일을 하기도 하였다.
멀을 타고 법당 입구까지 올라 갈 뿐만 아니고 신을 신을 채 법당에 들어가거나
혹은 술이나 육식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다.
이 하마비는 주 통로에서 그러한 행위를 막으려는 시도로 설치 된 것이다.
이 하마비 왼쪽 길은 금정산성으로 가는 길이므로 군인들이 말을 타고 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하마비 앞에서 일주문 쪽으로 가는 경우에 한정하여 
말에서 내리도록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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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일주문


 조계문이라 한다.
이 문을 세운 정확한 시기는 알 수는 없으나 
조선 광해군 6년(1614)에 묘전화상이 여러 건물을 고쳐 지을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추측한다.
이후 정조 5년(1781)에 백암선사가 현재의 건물로 보수했다. 
앞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이 일주문은 주춧돌 위에 놓인 높은 돌 기둥 위에 짧은 나누 기둥을 세웠다. 
이런 구조로 삼해탈문이라고도 하는데 다른 사찰의 문이 한 칸인데 비해 
세칸으로 조성되어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삼해탈문은 공문空門 무상문無相門 무원문無願門이다.
이 문은 사찰의 일주문이 가지는 기능적인 건물로서의 가치와 함께 모든 구성 부재들의 적절한 배치와 결구를 통한 구조적인 합리성 등이 시각적으로 안정된 조형 및 의장성을 돋보이게 한다. 
한국전통 건축의 구조미를 잘 표현하여 우리나라 일주문 중에서 걸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좌측과 우측의 현판인 금정산범어사, 선찰대본산은 일제시기는 서예가 김성근이 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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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 

일주문 다음은 천왕문이다. 사천왕문이라 하는데 정면 세칸의 맞배집이다.
정면 기둥에는 네 폭의 주련이 있고 안쪽 통로에는 사천왕이 배치 되어있다.
주련은 오른쪽 부터 
"帝釋天王慧鑑明(제석천왕혜감명) 제석천왕은 지혜고 살펴 밝으니 
哀愍衆生如赤子(애민중생여적자) 중생을 갓난아기 처럼 애민히 여겨
四洲人事一念知(사주인사일념지) 사대주의 사람과 일을 한 찰나에 아내
是故我今恭敬禮(시고아금공경례) 이러한 까닭으로 내가 지금 공경하여 예한다네" 라했다. 
이는 석문의범 신중 작법 탄백의 내용으로 도리천의 왕을 찬탄하는 게송이다.
안쪽 오른쪽에는 남쪽의 증장천왕(중생들의 선근을 증장하게 한다.)이 
동쪽의 지국천왕(국토를 보호한다.)이 
​왼쪽에는  서쪽의 광목천왕(청정한 눈으로 염부제를 살핀다.) 북쪽의 다문천왕(복과 덕을 베풀며 사방의 소리를 듣는다.)이 배치 되어 있다.
사분율에 의하면 이들은 부처님 성도하시고 첫 공양을 드실 바루를 보시했다.
이때 부처님은 각각 하나씩 네게를 포게놓고 눌러 하나로 만들어 쓰셨다 했다.
이들은 원래 욕계 여섯 하늘 가운데 첫번째 하늘에 속한다.
부처님을 받들어 불법을 수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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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문

둘이 없는 진리를 상징하는 말이 불이이다.
​법성계에서도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가지 모양이 없다.' 했다 불이라는 말은 유마경에 등장한다. 유마경 아홉번째 불이법문품에 30명의 보살들이 유마거사의 병문안을 가서 둘이 없는 법문에 대하여 장황하게 말했다.  이때 유마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말로 하는 순간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 한 것이다.
불이는 중론에 의하면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음'이라 했고
대승의장에는 '하나의 진실한 이치는 미묘하고 고요하며 여여하고 평등하여 피차를 벗어났다.' 했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불구부증 부증불감' 등의 말씀이 모두 이 불이를 말한다.
이 문의 정명에는 두폭의 주련이 있다.
왼쪽부터 '神光不昧萬古徽猷 신광불매막존지해 신이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밝고밝도다.
入此門內莫存知解 입차문내 不二막존지해 이 문안에 들어왔으면 아름알이를 남겨 두지 말라.' 라 했다.
여기에서 '신광'은 붛성, 중생의 본성, 자성, 이고 '이 문'은 부처의 가르침, 공문, 진리의 세계등으로 이해 된다. 이 주련과 불이문은 서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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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루

보제루에서 보제는 널리 제도한다는 말이다.
범망경보살계본 소 5월에 여덟 가지 복전가운데 공경삼보가 있다. 삼보는 가히 공경할만하므로 보불이라 하는게 그 공덕은 '널리 중생들을 제도하여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게 하므로 공경할 만하다.' 했는데 이 '널리 제도한다.'는 말이 이 누각의 이름이다.
또 양무제가 꿈을 꾸었는데 신이한 스님이 나타나 '수륙제를 베풀어 널리 윤도와 사생의 뭇 영혼을 제도하라.' 했다. 보제란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사바세계의 고통에서 제도한다는 한다는 뜻이다.
이 건물은 사부대중이 모여 예불 올리고 법회하거나 법문하는 공간으로 이런 의미에 부합한다.
범어사는 예로 부터 큰법당이 적어 어간의 몇몇 스님을 제외하고 일반 대중은 이 보제루에서 예불하였다.
지금도 각종 대중법회 법문은 이 보제루에서 시행한다. 
숙종연간에 지어진 건물은 근래 방화로 소실되고 다시 지었다. 이때 한 칸 정도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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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계단
보제루를 지나 마당에서서 돌아보면 금강계단이다.
금강계댄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는 보제루의 용도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근대 범어사 역사에서 범어사의 역활과 위상을 보여주는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범어사의 근현대 불교사적 역활은 '경허스님을 초빙하여 간화선운동의 시작 선원의 개설' '130년 전 범망경보살계 수계및 지계운동의 시작' '한국불교 근대화의 중심 역활 수행과 보편교육시행 및 유학승 파견'등이 있다. 이 건물은 그 가운데 지계운동의 중심지였다.
성월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동산스님으로 이어져온 조계종 지계의 산실이다. 지금도 범어사와 이건물에서는 조계종 단일계단이 1980년 부터 매년 개최된다.
금강계단이라한 현판 아래에 오른 쪽에서 부터 
"佛說一切法 불설일체법-부처님께서 모든 법을 말씀 하시니
爲度一切心 위도일체심-모든 마음을 제도하기 위함이로다.
若無一切心 약무일체심-만약 모든 마음이 없다면
何用一切法 하용일체법-모든 법이 어디 필요하리요" 한 게송이 동산스님이 쓴 주련이 있다.
이는 전심법요와 완능록  황벽의 어록과 관계 있다. 어떤 스님이 '다만 나고 죽음의 번뇌등 마음이 없으면 육바라밀이니 보리등 법도 필요없지 않는가?' 물음에 황벽은 '부처가 모든 법을 말하여/나의 모든 마음을 제도하려하나.나의 모든 마음이 없으면/모든 법인들 어디에 필요하랴!(佛說一切法/度我一切心/我無一切心/何用一切法)'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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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실(심검당)

보제루 아래 통로를 지나 마당에 올라오면 정면 계단 위에 대웅전 관음전 지장전이 보이고 
왼쪽으로 원주실이, 오른쪽에는 선원 미륵전 비로전이 보인다.
원주실은 원래 심검당이라는 이름이었다. 지금도 심검당이라는 현판은 남아있다. 원주실이 되기 전에는 선원이지 않앗을까?
심검이란 칼을 찾는다는 뜻이다. 이 집은 번뇌망상을 끊을 칼을 찾는 곳이라는 뜻이다.
화두에 취모검吹毛劍이 있다. 머리카락 칼날에 입으로 불어 자르는 칼이다. 
비유로 반야지혜의 칼이다. 
즉 심검당이란 이 반야지혜의 칼을 찾는 곳이라는 뜻이다.
벽암록 100칙에 파능취모검있다.
누가 파능에게 물었다. '무엇이 취모검입니다?' 이에 파능은 '산호가지가 달을 지탱하노라.' 했다.또 초발심자경문가운데 자경문 다섯째 게송에 졸지 말고 정진하라 하면서 
'조름의 구름이 마음에 달을 어둠게 하니/행할 사람이 이에 이르러 다 길을 모르나니/이중에 취모검을 잡아 일으켜 두며/구름이 본래 얼굴이 없어 달리 저절로 밝아지리라.' 했다.
원문에는 '
취모검은 '취모리吹毛利' 라 했으나 언해에는 '취모검'이라 한글로 표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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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

원주실앞에는 축대 아래에 두개의 돌기둥과 석등이 있다.
돌기둥은 반대쪽에 정면에 두개씩 네개 그리고  다시 오쪽 축대 아래에 두개 모두 8개가 있다.
석축 앞 돌기둥은 아마도 인로왕법등 번을 걸기 위한 기둥을 세우는 것이고 마주보이는 네개는 괘불을 세우기 위한 지주이다.

석등은 팔각이다. 하대석과 상대석은 모두 연꽃이 조성되어 있다. 간주석도 자세히 보면 아래가 좁고 위가 넓다.
옥개석은 부연 2단의 부연이 표현되어 있다. 트이한 것은 이 팔각 옥개석위에 있는 노반은 팔각이 아닌 사각이다. 또 이 상륜의 노반은 건너편 석탑의 노반과 모양과 크기가 같아 보인다. 
아마도 다른 탑이 훼손되고 남은 노반을 올려놓은 것이 아닌가한다.
원래  용화전(미륵전) 앞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종루가 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하므로 타당한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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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주인 의상스님이 삼층석탑을 세우고 3년뒤(678년)에 세웠다고 전해지나 양식으로 보면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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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범어사에만 있는 형상입니다.
디자인이나 조각 수법이나 표면 처리등을 보면 근세 작품 특히 일제 작품으로 보인다.  
아마도 일제 말기(1940~1945)으로 보임다.
당시 법당 정면 계단등 일부 석조물을 교체 또는 보수 한 것으로 보이는데 
계단과 계단 참등 이 이수를 제외 하고는 모두 기하학적이다.  
전국적으로 1943년경에 많은 사찰에서 교체 보수 불사가 잇었던 것으로 파악 된다. 
문경의 김룡사 와 대승사의 경우 마당에 심하게 훼손도니 노반을 새로 조성하였는데 
모두 조성기가 있어 그시기를  알 수 있는데 모두 1943년이다.
모두 절단면이 균일하고 표면의 도두락 처리 역시 미세하여 
현대적 동력과 기구를 사용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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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종각 선원 미륵전 비로전

원주실(심검당) 건너에 삼층석탑 괘불대 종각 선원 미륵전 비로전이 있다.
범어사에서만 볼수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종각은 월래 지금의 석등 위치에 있던것을 일제 때 현제의 위치로 옮겼다.
종각에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가 있었으나 옛 종은 박물관으로 옮기고 새로 조성한 종은 강원 앞 종각에 설치 했다. 
이 종각아래에 불교용품점이 잇다.
선원은  비로전과 미륵전 뒤인데 오른쪽에 모이는 문은 선원의 출입문으로 영주선재이라는 현판이 걸러 있다.
瀛洲禪齋(영주선재)에서 瀛洲(영주)는 동쪽 바다에 있다는 신선의 산 삼신산(三神山)으로 봉래·방장·영주 중 하나이다.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뜻합니다. 선재는 선수행 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영주선재 즉 '이 신선이 사는 곳 과 같은 청정한 곳에서 청정이 참선수행하라다.'는 뜻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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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삼층석탑

보물이다. 보제루를 지나면 법당 아래 계단 오른쪽에 보인다.
통일신라 흥덕왕(재위 826~826년) 때 건립되었다.
범어사 대웅전 아래 마당에 있는 석탑으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이 탑은 기단 2층에 안상(眼象)을 큼직하게 조각되어 있다. 사면에 모두 있지 않고 남북 양 변에만 있다. 
탑신 1층 몸돌(탑신)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은 급격히 줄어 다른 탑에 비해 비례가 어색하다. 각층의 지붕돌(옥개석)은 모두 4단의 부연이 조각되어 있고  평평하고 얇은 지붕돌은 처마가 수평이다. 이런 양식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 위에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만 남아 있을 뿐 다른 부분은 사라졌다.
일제 때 크게 수리를 하였는데 이때 기단 아래부분에 돌 하나를 첨가했다. 
이 때가 1940년대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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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종루)

일반적으로 종각이라하나 여기에는 종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실 종각에는 종만 있는 것이 아니고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네가지 즉 사물이 걸려 있다.
법고는 축생을 범종은 지옥중생을 목어는 물속의 중생을 운판 허공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부처님과 보살들의 원력을 계승하여 수행겠다는 뜻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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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매일 법당에서 종을 치며 아침에는 
'바라옵건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하여
철위산의 그윽한 어두움 다 밝아지고.
악도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칼산이 부서지고
모든 중생이 바른 깨달음을 이루소서...'라 하고 
저녁에는 
'이 종소리 듣고 번뇌는 끊어지고
지혜는 늘고 커져 보리가 나
지옥을 벗어나 삼계에 서 벗어나소서...
바라옵건대 부처의 과를 이루어 중생을 제도하리다.' 하고 발원한다.
일반적으로 이 두가지 발원문은 종각의 주련으로 걸어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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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대와 지주

괘불대이다. 괘불은 높이 걸어 두는 불화이다. 큰 행사를 할 때 이곳에 내다 거는 행사용 불화이다
이 괘불대는 최소 숙종 이후 설치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현재 범어사에는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1905년 제작된 괘불이 있다. 
현재 이 괘불은 박물관에서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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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습의 돌기둥이 범어사에는 두개 더 남아 있다. 법당 아래 석춘 앞에 계단 좌우로 두개씩 서있다.
이 것도 구조는 괘불대와 같다.
여기에는 각각 한깨의 기둥을 새우고 그 기둥사이에 줄을 걸고 그 줄에 인로왕번등을 단다. 
일주문 아래 당간지주가 법회들을 알리는 상징적 깃발을 거는 것이라면 
괘불대에는 행사시 대중이 참배할 주불을 
이 지주에는 행사를 장엄하는 장엄용 번을 설치한다.
현재는 원본괘불은 보관해 두고 실사본을 걸고 
인로왕번등은 법당 앞뜰 좌우에 설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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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선원 출입문이다.
현판의 영주선재은 풀어 쓰면 영주산의 선원이라는뜻이다.
영주산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 가운데 하나로 이 문을 열고 들어가 수행정진 하는 이들에 대한 당부일 것이다.
모든 세속의 반연한 일을 벗어나 오로지 화두 일념으로 정진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선원의 북쪽 대나무 숲에는 동상스님의 부로가 탑비가 있다. 
이 선원은 재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동산스님의 탑비도 재가인의 참배가 허락 되지 않는다.
이 선방 기둥에는 '묵언파정-말 없이 성정을 잡으라.' 속성정각-얼른 바른 깨달은을 이루라.'한 두폭의 주련이 있어
이곳에서 정진하는 선객을 경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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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전

선원 출입문 인쪽에 미륵전이 있다.
이 법당은 다른 법당과 달리 특이하다. 보통 법당은 가로로 배치되어 가운데 칸에 불상을 배치하는대 이 법당을 출입문 정면이 아닌 오른쪽 벽면에 안치 되어있다. 또 예선에응 석불이 모셔져 있었을 것이라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수미단 안쪽 불상 아래에 화강암육각좌대가 남아 있다. 불상은 목조이고 좌대는 석조이다. 
아마 임진왜란등 전란으로 파괴되고 남은 좌대위에 목조 좌대를 쓰우듯 올리고 비륵불을 모신듯 하다.
또 미륵불의 수인등을 보면 아미타불과 같다. 그래서 혹자는 창건시 미륵전이었고 미륵을 모셨었으나 우기에 아미타불을 모셨다한다.
미륵과 아미타는 모두 정토신앙의 대상인대 통일신라기에는 미타정토와 미륵정토가 함께 유행 했었으나 미륵정토사신앙은 차차 약해져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또 조선중기 즉 임난 이후 복원 중창된 사찰을 보면 대게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다. 
혹 어떻 경우는 법당 이른은 대웅전이나 본존의 아미타불인 경우도 발견된다. 
따라서 본존은 아미타불로 보아야 할수도 있다. 다만 복장기등을 확인 할 필요가 있다. 
아래 사진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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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_미륵전_본존.JPG
053_미륵전_좌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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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전
화엄삼성인이 비로자나부처님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범어사는 범성계의 저자이자 화엄종 승려인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어 화엄십찰 가운데 주요 사찰이었다.
화엄의 사상은 원융과 법계연기등이 중심인대  
다시 중심에 삼성원융론 오온원융 이무애 사무애 이사무애 사사무애등의 사상을 전계한다.
여기에 삼성성원융관이라는 수행 또는 이념이 제시된다. 이 삼성은 근본, 현상, 작용을 상징한다. 
비로자나는 근본을 문수보살은  현상 또는 상태를 보현보살은 그 작용을 상징한다. 따라서 비로자나 문수 보현을 본존과  현시로 모신 이 법당 그 화엄경의 핵심 사상을 포현하고 그 화연의 법계연기 무애원융에 중생이 귀의 하도록 하는 것이다.
​40화엄경 60화엄경 80화엄경등이 소의 경전이다. 
태백산 부석사. 비슬산의 옥천사,  지리산의 화엄사, 가야산의 해인사, 계룡산의 갑사, 모악산의 국신사, 우두산의 갈양사, 북한산의 청담사, 공상의 미리사를 더해 화엄십찰이라 한다.
055_비로전본존.JPG
화엄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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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전의 삼존불이다. 본존으로 비로자나불 우보처는 보현보살 좌보처는 문수보살이다.
그림으로 표현할때 보현은 흰 코끼리를 타고 문수는 사자를 타고 있다.
비로자나라는 말은 광명이 두루 비친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지혜는 여러가지로 빛을 나투어 중생들을 비추고 있다는 의미로 진리가  이미 중생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보현보살은 이치와 선정과 혜용을 상징하며 화엄경에서는 보현행원품에서 열사지 행원을 실천한다 했다. 또 모든 보살의 행원을 보현행원이라고도 한다.
문수보살은  부처의 지혜와 부처님 지혜의 특별한 덕을 상징한다. 또 모든 부처님들의 어머니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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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전

비로전 앞 계단을 올라가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은 관음전이다.
관세음보살을 본존으로 모신 건물이다. 관세음보살을 한국불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다.
그것은 관세은보살의 원력을 근거로 하는대 천수전안 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신 대다라니경에 의하면 보상을 이니 정법명경이라는 부처가 되었으나 스스로 보살행을 발원하여 중생을 제도하기로 했다. 중생의 바람에따라 어떤 중생에게라도 그 중생의 모습으로 나타나 제도하리라 발원 하였다.
그래서 11면 관음, 32응신,  백의관음, 양류관음등 수많은 관음상이 존재한다.   
범어사 관음전은 기도도량으로 영험스럽다고 알려져있다.
아래는 관음전 외벽의 벽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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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본존인 관세음보살과 선재동자이다
관세음보살은 스스로 중생 제도의 서원을 세웠으며 아미타부처님의 협시보살이기도하다.
보살은 중생들을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역활을 하는데 
주요 관음 신앙은 관음 염불과 다라니가 있다.
관음염불은 능엄경 법화경 화엄경등에 관세음이 중생 누군든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고난에서 벗어나리라한 원력에 의하고 
주문은 대비주 육자대명왕 진언 등이 있는대 이 진언으로 중생을 두려음에서벗어나게 하리라하 원력에 의한다.
특히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는 관음의 십대원등을 주력하기 전에 하도록 하는대 이는 관음의 서원을 행자 자신의 서원으로 받아들여 이 서원들을 이루기위한 주력 수행을 하게 한 것이다.
결국 관음 신앙은 세족성 바람을 가진 이라 하더라도 관음의 원력을 배우고 믿고 알아 자신의 원력으로 승화시켜 주력 또는 염불로 일심을 이루어 성취하하고 나아가서 일체중생과 함께 하려는 관음과 같이 회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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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큰법당)

보물이다.
현재의 법당은 1658년 효종 9년에 건립되었다. 
대웅전 종도리 묵서명에서 효종 9년(1658) 상량식을 거행했다 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범어사가 갖는 일본과의 전략적 위치로 국가적 목적에 의해 1602년 당시 현감이 임시 복구하고 승병을 거주하게 했다. 
이후 효종때 이르러 다시 중창 하였다. 
또 대웅전 기단의 석각에는 강희 10(1671년)에 석축이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밖에 암막새의 명문과 기단 각자, 목부재 기록 등으로 볼 때 현재 대웅전은 17세기에 중건된 것이 분명하다.
이 건물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이다. 다만 측면 칸은 정면보다 짧다.  맛배집으로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다.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의 닷집과 불단과 불상을 장식하는 지붕 모형의 닫집에서 보이는 조각의 정교함과 섬세함은, 조선 중기 불교건축의 아름다움과 조선시대 목조공예의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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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석가여래 삼존

석가모니부처님 제화갈라보살 미륵불이다.  수기삼존 또는 삼세불이라고도 한다. 
복장기에 의하면  명 순치 18년인 조선 현종 2년(1661년)에 조성 되었다. 
제화갈라는 정광여래(범어 Dīpaṃkarara은 음역으로 제화갈라提和竭羅) 이다. 즉 정광(연등)여래를 보살로 표현 한 것이다.
정광여래는 연등불이라 하기도 하는데 석가여래에게 전생으로 후생에 부처가 되리라 수기하신 부처다.
원력으로 정진하여 결국 성불한다는 가르침을 전하고
이미 과거에 성불의 수기를 받은 미륵보살은 미륵하생성불경에 의하면 
중생 스스로 열가지 선을 닦을 때 그 세계에 태어나 성불하고 중생을 제도 한다는 
원력과 수기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이 삼존불을 조성한 작가가 분명히 전해지는데 희장이 
경신 쌍묵 뇌영 신학 청언등과 함께 조성 하였다.
이 희장은 1639년에 청헌과 함께  
하동 쌍계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보물)을 조각하고
1646년에는 승일과 함께 지리산 천은사 수도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조성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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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벽화 미타삼존도

대웅전 남면(좌측) 벽화이다.
본존은 아미타불이고 우보처는 관세음보살이고  좌보처는 대세지보살이다.​​
관무량수불경등 정토경에 등장하는 불보살이다.
아미타부처님은 법장비구로써 48종 서원을 성취하여 서쪽에 정토를 구현하고 중생들이 고통을 격지 않고 성불의 길로 가게한다.
이 세계에는 아홉 가지 근기의 중생이 모두 가게 되는데 16가지 관법이 제시 되어있다.
또 이러한 관법 가운데 스스로의 근기를 바로 보도록 하며 
하근기 중생으로 하여금 염불하게 한다. 
일념왕생과 십념왕생을 가르치되  오랜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경에서는 염불 수행으로 관상하도록 한다. 관상이 성취되면 업식이 해결된다 했다.
관세음과 대세지는 중생의 근기와 원력과 성취에 따라 극락으로 인도한다.
2026년에 보물로 지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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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벽화 약사삼존도

대웅전 북쪽(오른쪽)벽화이다.
약사유리광여래와 일광보살 월광보살이다.
약사유리광여래 본원경의 변상도이다.
왼쪽에 연꽃위에 흰색 둥근 해를 든분이 일광보살이고 오른쪽에 연꽃위에 붉은 달은 든 이가 월광보살이다.
약사유리광여래는 현겁 최초의 부처로 중생의 번뇌라는 병을 치료한다.
그리고 이부처님으로 부터 53분의 부처님이 수기 받아 성불하고 다시 이 53불을 스승으로 과거의 1000불과 현재의 1000불과 미래의 1000불이 성불한다 했다.
일광보살은 왼 손에는 해를 들고 오른 손에는 만주적화를 들고 있으며 거위를 타고 손에 달을 들고 있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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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정면에 '摩訶大法王 無短亦無長 本來非皁白 隨處現靑黃-마하대법왕/짧지도 않고 또 길지도 않네/본래 검지도 희지도 않으나/장소 따라 푸르게도 누렇게도 나타나네...'라 한 주련은 금강경의 마하에 대한 야보도천의 게송으로 동산스님 친필이다.
하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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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석축 준공기
강희 1년(1671년) 조성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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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석축 정면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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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계단 소맷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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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내일에게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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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전

대웅전 왼쪽 즉 남쪽에  있다.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지장신행공간이다.  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시왕을 배치 사후명복을 비는 공간이기도 하다. 지장신앙은 지장보살본원경과 지장십륜경에 제시된 지장보살의 원력과 공덕을 기반으로 한다.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이 모두 성불하도록 자신의 성불을 미루고 중생을 제도 하리라 서원하고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러한 지장에게 후말세 중생을 부촉한다. 
지장은 13가지 바라밀을 제시하고 자신의 이름을 되뇌어 집중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 송대에 장천이라는 도사가 불교의 지장사상과 중국 전래의 사후관을 더하여 예수시왕생칠경이라는 위경을 저술하였는데 오늘날 지장 신앙과 지장전(명부전)은 이를 모티브로  형선 전래 되었다. 그러나 지장사상을 구성하고 잇는 요소 가운데 지장보살, 도명존자 무독귀왕 염왕 그리고 과거생의 지장이 어머니를 위해 시행 했던 제례정도만 지장보살본원경등 부합하고 아홉 명왕과 간지별로 담당 명왕이나 의례는 다분히 중국 도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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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각정면에는 칠보사 석주스님의 휘호인 '地藏大聖威神力/恒河沙劫說難盡/見聞瞻禮一念間/利益人天無量事-지장대성인의 위신력/항하사겁토록 말해도 다하기 여럽다네/보고 듣고 우러러 예배하는 한 생각에/사람도 하늘도 무량한 일로 이롭게 하시네...' 주련이 있어 지장보살본원경의 가르침을 전한다.  
이 게송은 석문의범 지장예불문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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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
지장보살과 무독귀왕과 도명존자이다.
지장보살은 두건을 쓴 모급이나 비구의 모습으로 조성한다. 오른 손에 육환장을 집고 왼 손에는 바루를 들었다.
전생의 보살은 어머니의 명복을 위해 부처님을 조성하고 염불하며 공양올려 제의를 통해 어머니를 천도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 상례이다. 지장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부처가 되리라 서원한다. 그리고 13 바라밀수행과 자신의 이름을 염하여 집중하라 가르친다. 

무독귀왕은 지장보살본원경에서는 지장보살이 어머니를 위해 지옥에 갔을때 보살에게 보살의 공덕으로 어머니가 고에서 벗어나기 시작 했음을 일러주고 지옥의 구조를 설명해 준다.
도명존자는 경전에는 등장하지 않는 중국불교 설화상의 인물이다. 두 가지 설화가 있다. 
첫째는 김교작스님에게 땅을 준 인양화의 아들인 도명이라는 설과 둘째 중국 불교설화에 도명이라는 스님이 저승 즉 지옥에 가서 지장보살을 친견 했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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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신앙의 과제는 동아시아 민속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제례의 전래와 형식 속에 불교의 가르침 즉 정법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경전에서 중요 모티브를 추려보면 첫째 부모의 재물로 제례를 배품. 
둘째 제례에 소비된 것은 일체 중생에 대한 회향. 
셋째 부처님의 명호에 집중하거나 공양(조성 보수 권청)올림. 
넷째 불보살에 대한 귀의 찬탄. 
다섯째 이를 계기로 참회 발원 회향으로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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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지앙전 옆에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 뒤에 산영각이라는 산신각이 있다.
아마 이곳에 범어사가 창건되기 전  부산일대 민간신앙 의 중심지가 아이었을까 한다.
즉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로써 민족신앙의 지역 중심지 였을 것이다.
의상이 이곳에 절을 짓고 화엄사상을 전재 하면서 이 뒤에 산신각을 두고 민속신앙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바위밑에는 1980년대만 해도 사람이 들어갈만한 공간이 있었다 한다.
지금은 막아두었으나 아마도  이 공간과 그 앞에서 풍류도 수행자나 화랑이나 무당들이  수련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지금 이 바위에는 조선시대 동래 지역 부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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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영각

범어사에는 산신각을 산영각이라 한다.
앞에 큰 바위가 있는대 아마도 이 바위 밑이나 앞뜰이 절이 들어서기전 민족신앙의 수행공간이었을 것이다.
만은 민간이 모여 신앙행위 하던 곳이 불교가 들어오고 절이 되었으나 
민속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여 이곳에 집을 짓고 과거의 믿음을 가진 이들의 의지처로 남겨 두엇다.
이것은 불교의 정밀한 교의를  이해하고 수용할 지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이들의 의지처를 수용한 것으로 
불교의 근기에 따라 법을 쓴다거나 병에 따라 약을 쓴다는 사상의 적극적인 활용이라 할수 잇다.
이는 불교의 지평을 확장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범어사사에서는 단오 때 고당봉에서 고당제라는 산신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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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 독성각 나한전 

매우 특이한 건물이다.
원래 팔상전과 나한전이 각각 3칸 짜리 건물 2동이 좌우로 독립되어 있었다. 
다른 사찰에서는 독립된 건물로 따로 조성되어있으나 
범어사에서는 애초에 분리된 두동이었던 것을 합하여 한동으로 개조하고 그 가운데에는 독성각으로 배정 하였다. 
1905년 11월~1906년 11월 까지 개조 공사를 통해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팔상전과 나한전은 1706년 중수 때 건축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이 건물에는 약사전으로 올라가는 남면에서 부처 33폭의 변상도가 벽화로 조성되어 불교사의 주요 교훈을 표현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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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 앞마당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꺽어지면 부도전으로 가은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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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 삼존불

석가모니 불을 중심을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배치하고 좌우로 열여섯 아라한을 배열 했다..
십육나한은 
빈두로발라타사, 가약가벌차 가약가발리사, 소빈타, 낙거라, 발타라, 가리가, 발사랍비다라, 술박가, 반타가, 라후라.  나가서나, 인갈타, 벌나바사, 아시다, 주리반타가이다.
십율라한의 배치는 아래 사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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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나반존자

독성각은 천태각이라고도 한다 해인사 백련암의 경우 천태각이라 했다.
독성각의 본존은 독성 또는 나반존자라 하나 경전적 근거는 확인 되지 않는다. 
소원성취, 복덕, 수명 장수, 자손 번창 등을 비는 기도 대상이다. 
민간의 현세적 복덕을 비는 신앙과 만나 현세 이익을 구하는 기도대상이다.
탱화에는 흰 눈썹과 수염의 노승이 소나무 아래에 앉은 모습이 많이 그려져 전통적인 산신과 유사하다
또 이 독성각의 장엄 역시 산신각의 장엄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다만 석문의범 독성청에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삼명이 이미 증명하여 자리와 이타을 성취하고 복전이 되어 미륵을 기다리는 나반존자'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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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범어사 독성각의 벽화및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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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석조 석가여래삼존불과 팔상도

나한전과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제화갈라 미륵 두 보살을 매치했다.
이 법당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일생을 여덟 단계로 설명하는 그림 여덟폭이 안치 되어있다.
그림의 순서는 불단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첫째  셋째 다섯째 일곱째가 불단 왼쪽에 둘째로 넷째 여섯째 여덟째가 배치 되어있다.
팔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잇다.
도솔내의상 : 도솔천에 계시다가 사바세계로 오니는 과정
비람강생상 : 녹야원에서 태어나시는 과정
사문유관상 : 동서남북을 다니시면 생노병사와 수행자를 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과정.
유성출가상 : 출가하는 과정
설산수도상 : 출가후 6년 간 두명의 스승게 배우고 고행하며 수행하는 과정
수하항마상 : 삼독이라는 마를 항복받고 성도하는 과정.
녹원전법상 : 성도후 다섯 비구에서 처음 법을 설하는 과정.
쌍림열반상 : 사라쌍수라는 나무아래에서 반열반에 드시는 과정과  다비후의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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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도는 아래 사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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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래의상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꿈에 여섯개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를 탄 보살이 현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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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람강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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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달이 되어 어머니의 고향으로 가던 길에 룸비니에서 잠시 쉬었다.
이때 산기가 있어 나무가지를  잡으니 옆구리로 보살이 태어났다.
보살이 태어나시자  아옵마리 용이 나타나 목욕시키니 보살은 동서남불으로 일곱 걸음씩 걸으며 한손은 하늘을 한손을 땅을 가르키며 하늘위 하늘 아래에 나홀로 높다 하셨다.
아버지가 관상가를 불러 상을 보게 하였는데 집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하면 부처가 되리라 예언 한다.
어느날 농경제에 갔다가 약육강식의 장면을 보고 사색에 빠지니 
혹 출가할까 염려한 아버지는 보살이 오욕락을 즐기도록 한다.
또 온갖 학문과 기예를 익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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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유관상

보살은 이른바 삼시전이라는 여름궁전 겨울 궁전 봄가을 궁전에절기에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이는 혹 출가할까  염려한 아버지의 세강의 더럽고 거친 것과 격리 시키려는 배려였다.
그러나 각 궁전에서 절기에 따라 옮겨 다니는 과정에 
늙고 병들어 죽는 장면을 볼수 밖에 없었다. 이에 보살은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다시 궁전을 옮기다가 출가수행하는 사문을 보았다.
이때 그사문의 평안함을 통해 출가의 뜻을 키우게 된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가 이미  경험하는 연기의 사실을 
명확히 인지 하는 이와 인지하지 못하는 이의 차이를 발견하게 한다.
이미 우리는 연기만이 사실임을 경험하고 있다.
어떠한 방해  차단 이론등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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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출가상

사문유관의 경험으로 출가의 의지를 키우던 중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어느날 이제는 출가 하리라 할때 천신들이 때가 되었음을 알리고 도우니 
한밤이 이르러 자신이 늘 타던 말을 타고 성을 넘어 출가하신다.
 출가하여 스스로 버리를 깍고 입었던 옷은 마부에게 주고 차차 깊은 숲으로 스승을 찾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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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수도상

스스로 머리를 깍은 보살은 두사람의 스승을 섬긴다. 
외도로 식무변처정를 닦은 이와 비상비비상처정을 닦은이들이다
그들로 부터 각각 수행이 성취되었다고 인정받았으나 더욱 정진한다.
그리고 결국스스로 고행을 택하여 정진한다.
이때까지 고향에서 자신을 따라온 다섯비구는 함께 했다.
극단적인 고행을 실천하던 보살은 고행의 한계를 인지하고
고행을 버린다. 목욕하고 음식을 구해 먹고 편한 자리를 만들어 다시 수행한다.
이때 다섯 비구는 보살이 변절했다 생각하고 그를 떠난다.
그러나 보살은 그들을 잡거나 따라 가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수행에 매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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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항마상

보살이 마지막 수행에 접어들었다.
이때 마왕 파순이 꿈에 보살이 부처가 되는 굼을 꾸고 놀래 깨어난다.
그는 자신의​
 세딸을 보살앞에 보내 보살을 유혹하여 성불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리고 온갖 부귀영화를 약속하지만 보살을 유혹되지 않고 
마왕의 세딸에게 어떤 색욕도 일으키지 않고 
가죽주며니속의 피고름이라 평한다.
이에 세딸은 사라지고 보살의  정진을 더욱 깊어진다.
그리고 샛별이 뜰때 이것이 잇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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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원전법상-초전법륜상

성불하신 부처님은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여 전도를 결심한다.
먼저 아람가람과 울두람자에게 법을 설하리라 하였으나 이미 죽었다.
다시 다섯비구에게 법을 전하리라 하고 다섯 비구를 찾아가나 그들은 부처님을 외면하자 뜻을 모았다.
그러나 부처님이 다가 가자 그들을 점점 부처님에게 공경하는 마을을 내었다.
이대 부처님은 연기법의 대강과 사성제의 법과 삼법인과 12연기와 8정도와 중도를 설한다.
그리고 선언한다 세상에 2명의 아라한이 있다.
세상에는 4명의 아라한이 잇다. 세상에는 6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외도이던 가섭 3형제를 출가 시키고 
고향에서 석가족을 출가시키고 사리불과 가전연을 출가시키는 등 1250명을 출가시키고
빔비사라왕등 왕들과 장자들을 귀의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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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림열반상

40년간 전법하신 부처님은 어느날 두그루 사라나무 사이에서 쉬셨다.
그때 그 지역의 춘다라는 이가 부처님께 공양올리리라 하여 음식을 조리해 왔다.
이 공양을 드신 부처님은 복통을 앓으시다가 돌아가신다.
이때 가르침을 열반경 또는 유교경이라 한다.
자신의 등을 밝히고 법의 등을 밝히라 하였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고 다비하려 불을 붙였으나 불은 붙지 않았다.
마하가섭이 이르러 장례에 참여하니 저절로 불이 붙어 다비가 이루어졌다.
다비후 가섭은 부처님의 말씀을 절리한다.
칠엽굴이라는 곳에 500명의 아라한을 모아 경과 율을 정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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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전

약사유리광여래와 일광보살 월광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약사유리광여래본원경에 약사유리광여래는 현겁최초 부처님 이다. 
이 부처님을 약사여래라 하는 것은 중생의 번뇌라는 병을 고친다는 뜻이다 왼손바닦에 올려놓은 그릇을 약그릇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바루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남방불교의 불상 가운데도 왼손에 바루를 올린 조상들이 존재 한다.

원래 이 자리는 북극전이라는 칠성을 안치아고 기도하는 곳이었으나 20여년 전에 북극전을 약사전을 바꾸었다한다.
북극전은 불두칠성을 칠성여래라 의인화 하여 불교와 습합시킨 도교적 신앙이다.
지금도 강남 봉은사등 일부 사찰에 칠성각 또는 북극전이 있으며 별도로 전각이 설치되지 않은 경우 상성으로 보아
산신 독성 칠성을 함께 안치하고 삼성각이라 한 곳이 많다. 특히 조선 중기이후 삼성각의 건립이 잦았다.
민속신앙으로써 산신신앙, 불교적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써 독성,   현세적 발복으로 칠성으로 이해된다.
칠성각을 약사전으로 바꾼 것은 맹목적 무속적 신앙의 타파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이나 
경에 의한 옳바른 약사신앙으로 발전이 요청되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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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삼존좌상

약사유리광여래와 일광보살 월광보살이다.
약사유리광여래 본원경의 변상도이다.
왼쪽에 연꽃위에 흰색 둥근 해를 든분이 일광보살이고 오른쪽에 연꽃위에 붉은 달은 든 이가 월광보살이다.
약사유리광여래는 현겁 최초의 부처로 중생의 번뇌라는 병을 치료한다.
그리고 이부처님으로 부터 53분의 부처님이 수기 받아 성불하고 다시 이 53불을 스승으로 과거의 1000불과 현재의 1000불과 미래의 1000불이 성불한다 했다.
일광보살은 왼 손에는 해를 들고 오른 손에는 만주적화를 들고 있으며 거위를 타고 손에 달을 들고 있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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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암 가는 길

팔상전 마당 아래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돌담길이 있다.
이 길로 가면 신장이 그려진 판문이 있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휴휴정사 대성암 안양암이 있고
왼쪽으로 가면 부도전이 있다.
휴휴정사는 원래 극락암이었다. 근세 선원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회의실로 사용된다.
광덕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선원으로 사용 되었을 때 한 달간 용맹정신을 하기도 했다 한다.
대성암은 비구니 선원이이며 
대성암 오른쪽의 안양암은 이름으로 보면 미타 도량이나 근세에는 선원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방장스님 거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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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전 이정표

판문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오른쪽에 화장실과 연못이 있다. 
약 80m 내려오면 부도전 이정표가 있다.
길을 따라 약 70m 들어가면 약 50기의 부도가 나타난다.
이 부도전은 근래에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부도들을 모아 조성했다.
이 부도전에는 조선말기 부도 몇기와 근현대 선지식들의 부도가 있다. 

금강경 주석가인 소천스님, 
불광운동의  광덕스님, 
조계사에서 오랫동안 재가자들을 위해 경전을 강의하신 무진장스님의  부도가 있다.
이 부도전에는 한기만 부도와 탑비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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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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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스님 부도

초생달과 별로 마음심자를 구상화한 문양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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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스님부도

불광운동 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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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
자연석 눈과 입만 새기고 비석을 안치 했다.
여기만 부도와 탑비가 함께 있다.